당나라 황실의 왕비가 된 백제 공주 이야기

당나라 황실의 왕비가 된 백제 부여 공주

 

 

 

2004년 서안에서 백제왕가와 관련한 유물 하나가 출토되었습니다. 

 

그것은 백제의 마지막 왕인 부여 의자의 증손녀였던 

 

부여 태비(扶餘太妃, 690년~738년)의 묘지명이었습니다. 

 

역사학계에서는 부여 태비의 존재는 이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백제왕가의 혈손이었는지에 대해선 몰랐습니다. 

 

하지만 이번 묘지명이 발견된 후 부여 태비가 의자왕의 증손녀이고, 

 

당나라에 귀순해 백제 부흥 운동을 토벌한 부여융(扶餘隆, 615~682)의 손녀였음이 밝혀진 것이죠.

 

 

 







 

 

#1. 당나라 황실과 연을 맺은 백제 왕족 부여씨

 

 

태비 부여 씨의 할아버지 부여융은 의자왕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부여융이 의자왕의 태자였는지에 대해 설이 분분합니다. 

 

중국 측 기록에 따르면 일관되게 백제의 태자였다고 언급하고 있지만, 

 

삼국사기에는 부여 효가 의자왕의 맏아들이며, 백제의 태자라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부여 융은 나라가 망한 뒤, 아버지 의자왕과 함께 당나라 낙양으로 끌려갔습니다. 

 

하지만 당나라 황제의 배려로 사면을 받았고, 

 

죄인에서 풀려나 사농경이라는 벼슬에 오릅니다. 

 

부여융은 황제의 신하가 되어 옛 백제에서 일어나는 부흥 운동을 적극적으로 토벌합니다.

 

당나라에 협조한 공으로, 부여융은 비교적 순탄한 삶을 살게 되었지요. 

 

웅진 도독과 대방 군왕이라는 이성왕 (異姓王, 황실과는 성씨가 다르지만, 왕이 된 사람)의 칭호를 받아, 

 

요동 건안 고성에 있는 백제 유민을 다스립니다.

 

이렇듯, 백제 왕실은 당나라의 황실과 혼인을 이어갈 정도로 당나라에서 기반을 잡았나 봅니다. 

 

부여융의 손녀 태비 부여 씨는 당나라 황실의 일족인 이옹과 혼인했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그녀가 이옹의 후처로 들어갔다는 사실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녀는 이옹의 두 번째 부인이 되어, 당나라 황실로 시집을 간 것일까요?

 

 

 



 

<사진> 당나라 황실에 시집을 간 최초의 한국인(?) 부여 왕녀 

 

 

 

 

#2. 파란만장한 삶을 산 부여 태비의 남편 이옹

 

 

이옹은 당나라 신효 황제인 이연(李淵)의 증손으로, 

 

이연의 열다섯 번째 아들인 괵왕 이봉의 손자였습니다. 

 

당나라 황실의 직계 적손이었지만, 그의 집안은 반란에 가담한 혐의로 풍비박산(風飛雹散) 나버렸습니다. 

 

이옹은 지방을 이리저리 떠도는 신세가 되어버렸지요. 

 

다행히도, 당 중종이 즉위한 후 집안의 혐의가 모두 풀려서 

 

대대로 세습 받았던 괵왕의 지위에 다시 오르게 됩니다. 

 

그리고선 당 중종의 정비였던 위황후의 여동생 숭국 부인과 결혼하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이옹에게 또 다른 시련이 찾아오게 됩니다. 

 

부인의 언니였던 위황후가 딸 안락공주와 모의하여 남편인 중종을 독살해버린 겁니다. 

 

역모를 일으킨 셈입니다. 시어머니 측천무후와 같은 여자 황제가 되고 싶었던 것이지요.

 

 


<측천무후는 공포정치를 했다는 비난과, 민생을 보살펴 나라를 훌륭히 다스린 황제라는 칭송을 같이 받고 있다. 그녀가 통치했던 15년을 '무주의 치' 라 부른다.> 

 

 

 

당 중종과 위황후에겐 막내딸 안락공주가 있었습니다. 

 

위황후는 안락공주를 총애하여, 공주를 황태녀로 삼고 여황제로 만들려고 했어요. 

 

하지만, 당 중종이 강력하게 반대를 했고, 앙심을 품은 위 왕후와 안락공주는 중종을 시해했습니다. 

 

가부장적 사고가 깊었던 중국이기에, 

 

측천무후 뒤를 이은 두 번째 여황제를 맞이한다는 건 쉽게 허락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위 왕후와 안락공주는 나라를 다스릴만한 능력이 부족해도 한참 부족했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였지요. 

 

백성들은 그녀를 용납하지 못했습니다. 

 

반역은 쉽게 진압되었고, 이옹은 위황후의 여동생이자

 

자신의 부인인 위 씨의 목을 직접 베어 황태자 이융기(당 현종)에게 받쳤습니다. 

 

 

 

<당 태종의 '정관의 치'에 이은 '개원의 치'를 이룩했다고 평가받은 당 현종 이융기였지만, 희대의 요녀였던 양귀비의 등장으로 몰락한다.>

 

 

 

덕분에 목숨은 구했지만, 괵왕의 지위는 잃어버렸습니다.

 

이옹은 정변을 여러 번 겪고 나자, 깊은 생각에 빠졌습니다. 

 

자신의 시련이 모두 황실과 가까이 있던 현실 때문이라는 걸 느낀 겁니다. 

 

그래서 황실과는 연이 비교적 옅은 집안을 처가로 맞이하려고 했지요. 

 

그때, 이옹의 눈에 들어온 건 바로, 백제 왕실이었습니다. 

 

대방 군왕이라는 왕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고 중앙 정계와도 연결되어 있어서, 

 

잘만하면 자신의 지위를 되찾아올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이옹의 전략은 그대로 맞아떨어졌습니다. 부여 씨와의 결혼으로 다시 중앙으로 진출했고 

 

괵왕의 지위를 회복했기 때문입니다.

 

 

 

 

#3. 의외로 높았던 백제 왕실의 지위

 

 

이옹의 두 번째 처가인 백제 왕실은 667년 당나라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의자왕과 부여융은 당나라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당 고종 앞에서 항복 의식을 치렀고, 

 

당 고종은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던 황제였으므로 그들을 사면해주었지요. 

 

의자왕은 머나먼 땅에서 급작스럽게 사망했고 

 

그의 아들 부여융은 당나라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면서 지위와 권세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대방 군왕이 되어, 왕으로서 요동에 있던 백제 유민을 다스리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로는 멸망한 나라의 후손은 비참한 삶을 맞이했을 거라 짐작합니다. 

 

조선왕조에 멸망한 고려의 왕실도 그러했고, 청나라에 멸망한 명나라의 황실도 그러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와 반대의 일도 있습니다. 

 

고려에 귀순한 신라의 경순왕은 경주의 사심관이 되어 

 

경주김씨 가문과 지위를 보존했으며 조선왕조 역시 일본에 멸망했지만, 

 

조선왕실은 이왕가(家)라는 가문의 지위는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 당나라에 귀순한 백제 왕실도 신라나 조선왕실처럼 협력의 대가로 

 

그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지 않나 싶습니다.

 

대방 군왕 부여융의 손녀딸인 태비 부여 씨는 성격이 조용하고, 

 

현숙한 덕을 갖춘 여인이었습니다. 

 

이러한 그녀의 성품은 온전히 집안 영향으로 생각되네요. 

 

백제 왕실의 조용한 처신은 장안에서도 유명해서, 

 

당나라 황실이 '군자의 집안'이라고 칭찬한 기록이 사서에까지 보이기 때문입니다. 

 

의자왕이 '해동 증자'라는 미칭을 받은 것을 떠올려보면, 

 

백제 왕실은 '수신제가'를 금과옥조로 여겼나 봅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그녀는 집안이 좋았을 뿐만 아니라, 미모까지 뛰어났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녀의 묘비명에 자세히 실려 있습니다.

 

 

 

 “남국(南國) 사람의 얼굴처럼 아름다우니 봄날의 숲과 가을 단풍 같았다. 아주 좋은 집에서 살았으나, 아침 햇살처럼 조용히 움직여 드러나지 않으니 세상에 드물게 어진 사람이며 덕이 있어 외롭지 않았고 속마음과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 같았다.” 또한 “이옹과 혼인한 후 집안을 일으켰다.”

 

-부여 태비 묘지명 중(中)

 

 

 

 

#4. 자신을 잘 보존하여, 부귀를 누린 부여 태비

 

 

봄날의 숲과 같은 자태, 

 

남국 사람의 아름다운 얼굴이라는 칭송이 정말 흥미롭습니다. 

 

한국 여인의 풍모가 이런 것이었을까요? 

 

남쪽 나라는 밝음을 뜻해서 온풍이 불고, 

 

아름다운 음악이 유명하여, 미녀들이 많기로 소문이 났으니 

 

묘지명의 표현은 미려하게 꾸민 말이 아니라, 진실인 게 분명합니다.

 

 

 

<남국 미인으로 평가받았던 백제 공주가 바로 부여태비였다.>

 

 

그녀가 이옹과 결혼한 나이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만, 

 

그녀의 몰년이 묘비에 기록되어 있어 이를 역산해 추적하면

 

대략 21살의 나이로 괵왕 이옹과 혼인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어요.

 

한반도를 지배한 드높은 가문과 고귀한 왕족의 혈통은 

 

그녀를 향기롭고 아름다운 사람으로 만들기 충분했습니다. 

 

군자의 배필이 되기에 안성맞춤이었던 셈이죠. 

 

게다가 미모까지 뛰어났으니, 

 

이런 부여 씨의 소문은 당나라 수도인 장안을 뒤흔들기도 했을 겁니다. 

 

이옹과 결혼한 부여 씨는 비교적 조용하게 살았던 거 같습니다. 

 

그래서 남편 이옹도 그녀를 많이 사랑했다는 기록이 묘비에 적혀져 있지요. 

 

727년 남편 이옹이 마흔아홉에 병사를 했고, 이때 그녀의 나이는 서른여덟이었습니다. 

 

슬하에는 다섯 명의 자식이 있었습니다. 큰아들 이거가 왕위를 세습하였고, 

 

당나라 조정에서는 부여 씨에게 비로소 태비의 지위를 내려주었습니다. 

 

태비는 왕의 어머니인 대비와 같은 뜻입니다. 

 

클 태(太)자와 큰 대(大)자는 옛날에는 같은 글자로 혼용해 쓰기 때문입니다. 

 

부여 씨는 태비(太妃)가 된 7년 뒤에 세상을 떠났고 남편인 이옹과 함께 북망산에 묻혔습니다. 

 

이것이 역사에 기록된 그녀의 삶이었습니다.

 

그녀는 천성이 현숙하고 어진 덕분에 당나라 황실에 시집을 갈 수 있었고, 

 

오랫동안 자기 자신을 잘 다스렸기에 부귀를 지킬 수 있었으리라 봅니다. 

 

또, 하늘이 내려준 복록도 실컷 누렸다고 생각됩니다.

 

 

 

참고문헌:

 

-당 고(故) 곽 왕비 부여 씨 묘비 고(考) 

-KBS 역사스페셜-백제의 마지막 공주, 부여태비

 

[역사] 당나라 황실의 왕비가 된 백제 공주 이야기.jpg : MLB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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