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튼섬의 역사 5편-100년 전쟁

에드워드3세의 선전포고로 시작된 전쟁은 유럽 전역이 주목하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스코틀랜드는 프랑스편을,

프랑스 경쟁국들은 잉글랜드편을 들었지만

 

400만의 인구를 가진 잉글랜드가 2100만의 인구를 가진 프랑스를 상대로 승리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잉글랜드는 국왕 '에드워드3세' 와

 


왕세자 '흑태자 에드워드'가 군대를 이끌었고

 


프랑스는 국왕 '필리프6세' 가 군사를 이끌었다.

 

 

 

1340년 6월


슬로이스 해전에서

 

영국군은 전함 250척, 병사 2만2천명으로

 

프랑스군 전함 200척중 180척을 파괴하고 사상자 2만명을 만들며 해상권을 장악하였다.

 


이에 1346년 8월, 필리프6세는 프랑스가 자랑하는 중장기병대 1만2천을 포함 총 3~4만에 이르는 대군을 이끌고 잉글랜드군을 막기 위해 크레시로 향한다.

 


기병이 주축인 프랑스와 달리 잉글랜드는 1만9천명의 병사중 1만명이 장궁병이었고 나머지는 보병들로 이루어진 군대였으나

 


프랑스군에 속한 제노바 석궁병들 보다 사거리,위력,연사속도 모두 위였다.

 


그것을 모르던 프랑스의 중장기병들은 평소처럼 '개처럼 돌격하는' 일명 개돌 전술을 썼고

 


잉글랜드 장궁병들의 먹이가 되어 대패한다.

 

 크레시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15000명의 사상자와 왕자11명과 1200명의 기사, 필리프6세의 동생 '알랑숑 백작 샤를 2세' 그리고 룩셈부르크 백작이자 보헤미아의 왕인 '장님왕 얀'이 전사하는 엄청 큰 피해를 입는다.

 

이때 필리프6세 또한 중상을 입고 만다.

 

완벽한 승리를 장식한 잉글랜드는 프랑스의 여러 도시들을 공격하였고 그중

 


'칼레' 라는 도시는 1년간 잉글랜드군에 맞서 버티다가 함락되자

 

에드워드3세가 학살을 하는 대신

 

시민대표 6명만 처형하겠다는 조건을 걸었고

 

이에 귀족6명이 노블리스오블리제를 실천하며 대표로 나왔는데

그걸 보며 감동받은 시민들이 입에서 입으로 이 이야기를 전했고

 

한 예술가도 그 이야기를 듣고 감동받아 조각상을 만드니

 


그게 바로 유명한 로뎅의 '칼레의 시민' 조각상이다만

 

이 이야기는 사실 미화된거고 실제로는 칼레시민들을 처형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항복했다고 한다.

 

 

한편 프랑스는 전쟁에서 계속 패배하는 상황이 지속되었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1348년 흑사병이 발발한다.

 

또한

 


1350년 필리프6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장2세가 왕위에 올랐고

 

장2세는 선왕이 이루지 못한 뜻을 이루기 위해

 


2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1356년 푸아티에로 진격한다.

 

그러나 장2세를 맞이하고 있던건

 


백전백승의 흑태자 에드워드였고

 

장궁병만 3000명으로 이루어진 7000명의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17000명의 프랑스 기병대는 또 개돌하다가

 


화살비를 맞고 전멸한다.

 


이 전투로 프랑스 국왕 '장2세'가 포로로 잡혔으며

 

전멸한 기사단을 제외하더라도 고위 귀족17명, 백작13명, 자작5명, 기사100명이 죽고 2500명의 사상자를 낸다.

 

전쟁 후 프랑스에서는 흑사병의 여파가 일어났는데

 

흑사병으로 인구가 2천만명에서 1천만명으로 감소하자 걷어들이던 세금이 비례하여 줄어들었고

 

프랑스는 세금을 높이게 된다.

 

이에 전쟁과 흑사병으로 지친 농민들이


1358년 반란을 일으키면서 '자크리의 난'이 발생한다.

 

프랑스가 복잡한틈을타 잉글랜드는 

 


(회색이 잉글랜드 영토)

 

1360년 잉글랜드가 아키텐,칼레,퐁티웨,푸아투등의 도시를 점령하는 것에 동의하는 '브레티니 조약'을 맺어 일시적인 휴전을 한다.

 

다만 잉글랜드 또한 프랑스 왕위 계승권 주장을 철회하는 조건에 동의한다.

 

이때까지를 백년전쟁 1기라고 한다.

 

한편

 


포로가 된 프랑스 왕, 장2세는 영국에게 몸값 3000만 크라운을 지불했어야했는데

 

당시에 3000만 크라운은 프랑스 국가 전체의 1년치 수익의 2배나 되는 값이었다.

 

이에 장2세는 프랑스가서 주겠다고 약속했으나 결국 구하지 못해 다시 영국으로 가서 포로생활을 했고

 

1364년 런던에서 사망한다.

(어차피 왕족들은 포로가 되어도 왕처럼 취급을 받아 놀고 먹다 죽은듯)

 


장2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현명왕 샤를 5세'가 왕위에 올랐고

 

 

휴전중에서도 승리한 잉글랜드군들이 프랑스 전역을 약탈하며 깽판을 치고 있자

 


프랑스의 명장 브르타뉴의 독수리 '베르트랑 뒤 게클랭'과 함께 게릴라전술로 잉글랜드를 격파한다.

 


다만 흑태자 에드워드 상대로는 가망이 없어서

 

흑태자 에드워드가 각지에서 프랑스,카스티야군을 쳐바르고 있을때 조용히 있다가

 


1376년 흑태자 에드워드가 병에 걸려 사망하고

 


1377년 에드워드3세까지 사망하자

 

이때를 놓치지않고 샤를5세와 베르트랑 뒤 게클랭은

 


1380년 노르망디와 가스타뉴를 제외한 기존 영토를 거의 다 회복한다.

 


그러나 샤를5세는 그해 사망하고

 


그의 아들 '샤를 6세'가 왕위에 오른다.

 

한편 에드워드3세가 죽고 그의 아들 흑태자 에드워드까지 죽은 잉글랜드는 흑태자 에드워드의 아들

 


'리처드2세'가 왕위에 오르지만 11살밖에 안된 어린 나이로 왕이 되어

 


그의 숙부이자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이 섭정을 맡으면서 다시 귀족들의 힘이 커진다.

 

때마침 프랑스에서 전선의 전황이 불리해지고 그로인해 재정 또한 적자가 나자

 


의회는 인두세를 부과하였고

 

이에 빡친 하층민과 농민들은


1381년 '와트 타일러'를 중심으로 수만명이 반란을 일으켜 런던으로 진격한다.

 

이 사건을 '와트 타일러의 난'이라고 한다.

 


(현 런던시장, 파키스탄계라함)

그러나 런던시장이 회담을 하는척 불러들여 와트 타일러를 살해하고 나머지 농민군들도 진압한다.

 


한편 이번에는 잉글랜드가 혼란스럽자 반대로 프랑스가 '장 드 비엔드' 제독을 앞세워 스코틀랜드에 상륙해서

 


스코틀랜드 4000명과 연합하여

 


잉글랜드 북부 '노섬벌랜드'를 침공한다.

 

이 소식을 들은 잉글랜드는 개빡쳐서

 


2만명의 대군을 소집하여 반격에 나섰고

 


오히려 스코틀랜드 왕국의 수도 '에딘버러'가 불탔으며

 


로우랜드 지방 대부분이 약탈을 당하면서 도시들이 불탔다.

 


ㅎㅎ...ㅈㅅ...ㅋㅋ!!

 

전쟁의 형세를 잉글랜드가 손쉽게 가져가자 프랑스는 바로 발을 뺏고

 


오히려 자기네만 피해가 막심해지자 스코틀랜드는 프랑스에 크게 분노하여 두 국가간의 사이가 나빠진다.

(물론 다시 연합하여 잉글랜드에 맞서 싸우긴함)

 

잠깐의 전쟁이 끝난 후. 1399년 2월


곤트의 존이 사망하자

 


리처드2세는 랭커스터가의 세력이 커지기전에 곤트의 존의 막대한 영지를 몰수한다.

 


(왜 19?)

 

그런데 무슨 생각인지 왕궁내의 적들을 만들어 놓고는 그해 5월에 리처드2세가 직접 아일랜드 원정을 떠나니

 


그틈을 놓치지 않고 왕의 사촌이자 곤트의 존의 아들인 랭커스터가의 해리포드 공작 '헨리4세'가 의회파 세력을 규합하고 리처드2세의 왕권을 빼앗는다.

 

뒤늦게 이를 알아차린 리처드2세는 8월이 되서야 급히 돌아왔지만

 

이미 늦어서 싸워보지도 못하고 항복.

 

9월30일에 정식으로 폐위되어

 

헨리4세가 왕위에 오르니

 


플랜테저넷 왕조가 막을 내리고

 

랭커스터 왕조가 시작된다.

 

 

그리고 여기까지를

 

백년전쟁 소강기라고 한다.

.

.

.

.

.

.

.

한편

 

잉글랜드의 왕조가 바뀌던 와중에

 

프랑스는 커다란 사건이 일어난다.

 

 

샤를 6세가 정신병에 걸려 나라를 통치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에 두 명의 남자가 자신이 섭정을 해야한다며 주장하는데

 

그 두 명이

 

 

샤를6세의 사촌이자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1세'와

 


(왜 19?2)

샤를6세의 동생이자 오를레앙의 공작 '루이1세'였다.

 

이 둘의 갈등은 점차 커졌고

 

장1세의 '부르고뉴공작파'와

 

루이1세의 '알마냑파'로 내분이 일어난다.

 

이 내분은

 


1404년 장1세에 의해 루이1세가 암살당하지만

 


알마냑파이자 샤를6세의 아들 '샤를7세'에 의해

 


장1세 또한 1419년에 암살당한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분노한 부르고뉴파의 '선량공 필리프'는

 


1413년 당시 잉글랜드의 왕이었던 '헨리5세'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잉글랜드와 부르고뉴가 결탁하면서

 

백년전쟁 2기가 시작된다.

 


1415년 군대를 이끌고 프랑스로 진격한 헨리5세는 프랑스로 진격, 노르망디에 상륙 후 칼레까지 진격하였다.

 


소식을 들은 프랑스가 정신병 걸린 샤를6세를 대신하여 '샤를 달 브레'를 총지휘관으로 임명 후 아쟁쿠르에서 잉글랜드군을 막기로 했지만

 


10월 25일 아쟁쿠르에서 벌여진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진흙탕에 빠져 움직일 수 없게 되고

 

이때를 놓치지 않고 헨리5세의 6000명의 잉글랜드군이 공격하여

 


프랑스군에게 화살비를 내려주니

 

프랑스군은 총지휘관 샤를 달 브레 포함 1만명이 궤멸당한다.

 


이후 나라를 팔아먹은 부르고뉴파의 도움까지 받으며

 


헨리5세의 잉글랜드군은 베르사유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1421년 보제전투에서 스코틀랜드의 지원군까지 격파한다.

 


이후 승기를 잡은 잉글랜드는 1420년 프랑스에게 굴욕적인 조약인 '트루아 조약'을 맺는다.

 

트루아 조약으로 헨리5세는 샤를6세의 딸 '카트린'과 결혼하였는데

 

이는 샤를6세 사후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 왕이 될 수 있는 명분을 만든 것 이다.

 

그러나 알마냑파는 트루아 조약을 인정하지 않았고

 

 


1422년 헨리5세와 샤를6세가 동시에 사망하자

 

각국은

 


헨리6세와

 


샤를7세를 왕위에 올린다.

 

그러나 이는 프랑스가 트루아 조약을 어긴 것이 되므로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다시 전쟁에 돌입하여

 


1428년 잉글랜드가 프랑스의 오를레앙을 포위하고

 

이때문에 프랑스의 전국토가 영국에 점령당할 위기에 처하지만

 

 

<어ㅡ이 이미 클리셰는 완성 됐다랄까...>

 

 

 

1429년

 

신의 계시를 받아 프랑스를 구하기 위해 왔다는 10대 소녀가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잔다르크' 이다.

 


잔다르크는 오를레앙 전투에서 농성이 아닌 야전으로 잉글랜드군을 몰아내며 프랑스군에게 첫 승리를 안겨준다.

 


잔다르크의 용맹함에 오를레앙 시민들과 군사들은 잔다르크를 따르며

 


1429년 6월 잔다르크와 1500명의 병사가 잉글랜드군의 전설적인 명장 '탈보트'의 5000명 군대를 상대로 파타이에서 승리한다.

 

이 파타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100명밖에 사망안했지만 잉글랜드군은 2500명이나 사망한다.

 

참고로 잔다르크는 파타이 전투에서 아쟁쿠르 전투때와 같은 전술을 사용해 잉글랜드군을 역관광시킨 것 이다.

 


승기를 잡은 잔다르크와 프랑스 군대는 1429년 7월, 트루아,랭스를 함락시켰고 부르고뉴를 관광 보낸다.

 

이시기 프랑스에서는 전통적으로 프랑스 국왕이

 


랭스의 노트르담 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뤄야만 정식왕의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의 샤를7세는 잔다르크가 랭스를 함락시키자 노트르담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뤄 정식으로 왕이 된다.

 


그러나 프랑스 귀족들은 잔다르크를 시기하였고

 

이는 샤를 7세 역시 자신 보다 잔다르크가 국민들에게 인기가 많자 신경이 거슬리기 시작한다.

 


그결과 1430년 콩피에뉴 전투에서 잔다르크는 패배해서 도망치는데

 

프랑스군은 잔다르크를 성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았고

 

결국 잔다르크는 부르고뉴파에게 사로잡혀 영국군에게 팔려나간다.

 

샤를7세는 잔다르크를 충분히 빼올 수 있는 보석금을 가지고 있었지만.....

 


1431년 5월 잔다르크는 루앙성 광장에서 화형을 당한다.

 

이때 그녀의 나이 고작 20세였다.

 


한편 잉글랜드군은 1435년 사령관 베드퍼드 공작 '존'이 사망하고

 


(참고로 얘가 잔다르크를 잉글랜드한테 판 애임)

같은시기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와

 


프랑스왕 샤를7세는 '아라스 조약' 으로 화해하여

 

잉글랜드군은 프랑스내 동맹군이던 부르고뉴를 잃어 전투가 어려워졌고

 

설상가상

 

잉글랜드내에서는

 


요크가문과

 


랭커스터 가문간의 대립이 슬슬 수면위로 부상하자 전쟁을 신경쓰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1441년 샹파뉴를 수복하고

 


1450년 포르미니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에게 승리하여

 


노르망디와 앙주를 점령한다.

 

참고로 이 전투에서도 프랑스는 개돌전술을 사용했는데

 

단, 잉글랜드의 장궁병 보다 사거리가 긴

 


대포를 사용하여 장애물 피해 없이 개돌에 성공하였다.

 

이후 프랑스의 개돌전술은 계속되다가 총의 등장으로 사라진다.

 

아무튼 프랑스군은 계속해서

 


1453년 장 뷔로의 카스티용 전투의 승리로

 


보르도,가스코뉴가 있는 기옌을 되찾으며

 


칼레를 제외한 모든 영토를 되찾고 프랑스 전역에서 잉글랜드군을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이후 1475년

 

헨리6세가 칼레라도 지키기 위해 노르망디와 아키텐 영지까지 프랑스에게 넘겼고

 

이에 잉글랜드는 더이상 프랑스에 전쟁을 걸 명분을 상실하여

 

정확히 116년간 계속된 100년 전쟁은 프랑스의 승리로 끝이 난다.

 

 

 

 



 

브리튼섬의 역사 5편. 100년 전쟁(사진이 많습니다)

1편 https://m.fmkorea.com/2311433925 2편 https://m.fmkorea.com/2313061805 3편 https://m.fmkorea.com/2314599638 4편 https://m.fmkorea.com/2316857899에드워드3세의 선전포고로 시작된 전쟁은 유럽 전역이 주목하기 시작했고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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