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채찍, 훈족의 대이동

유럽인의 영원한 악몽

 

 

 

서양 사람들이 역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아시아 역사 인물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을

뽑는다면, 과연 누가 가장 많은 표를 얻을까?

 

 

 

"석가모니? 진시황? 공자? 칭기즈칸? 누구지??"

 

 

 

"아니 정답은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테러리스트중 한명이야." 

 

 

 

 

"그게 누구냐고? 바로 아틸라Attila야."

 

 

 

아틸라는 순식간에 유럽의 모든 고대 문명을 파괴하는 동시에 깊은 상처와 공포를 심어 주었다.

 

중세 유럽에서 '아틸라'라는 이름만 들어도 밤새 보채던 어린아이가 울음을 그쳤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그만큼 아틸라의 명성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것 이상이었다.

 

 

 

"그런데 훈족은 어떻게 나타난 유목 민족이야?"

 

 

 

"과거엔 흉노로 낙인찍었다면......."

 

 

 

"흉노족과 훈족이 같은 민족이라는 걸 확실히 밝혀줄 근거는 전혀 없다고.."

 

 

 

"애초에 헝가리는 엄청난 오해로 인해 탄생한 나라인걸... 500년만에 갑작스러운 침입을 받는 마자르 족을 훈족이라 오해 했고.... 이들 스스로도 자신들을 훈족의 후예라고 인정하였으니까...."

 

 

 

헝가리의 아틸라상 헝가리는 아틸라를 겸손하고 후덕한 이미지의 국왕으로

 

유목 민족들은 위풍당당한 전사의 이미지로 표현한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훈족

 

 

 

4세기 중반, 어느 날 갑자기 돈 강 서쪽 언덕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아시아계 유목민족이 나타났다.

 

이떄부터 약 100여년간 유럽을 종횡무진하며 유럽 고대 문명 대부분을 폐허로 만들었다.

 

 

 

이들은 누구인가? 어디서 왔는가? 

그뒤 1000년이 넘도록 수많은 역사학자가 이들의 뿌리를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이 유목 민족은 동유럽 평원에 등장하기 전까지 그 어떠한 기록도 남기지 않은 것이어서....

 

하지만 18세기 후반, 동방 문화에 매료된 프랑스인 조제프 퀴니가 고대 중국 역사서를 {위서-서역전]을 읽던 중 뜻 밖의 사실을 발견하는데..

 

'열반국은 오손 서북쪽에 위치하는데, 대(북위의 수도)에서 1만 930여리 떨어져 있다. 그 조상은 흉노 북선우 부족이다.

한나라 거기장군 두헌에게 쫓겨난 북선우는 금미산을 넘어 서쪽 강거로 달아났다.'

 

 

 

 

 

"위서는 강거의 위치를 명확히 밝혔는데 강거는 오손의 서북쪽 , 

즉 아랄 해 동쪽 시르다리야 강 유역에 있었음."

 

 

 

"훈족의 첫 희생양이 된 알란족의 근거지로부터 불과 1,500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라고!!

더구나 서쪽으로 이동한 북흉노가 일단 강거에 도착했다면, 그뒤 200여년의 세월동안 대초원을 지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어!!"

 

 

 

로마 제국 쇠망사를 집필한 에드워드 기번은 퀴니의 주장을 예의 주시했고, 최종적으로 로마 쇠망사에 집필했다.

 

이렇게 작은 나비의 날갯짓에 불과했던 퀴니의 가설은 '훈족기원'과 관련된 논란에 불을 붙이며 역사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하지만 훈족 언어는 알타이제어에 속한 투르크어족과 더 유사하기도 하고...."

 

 

 

"러시아 유적지에서 발견된 유골이 훈족의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가 없으니.. DNA검사도 소용이 없지..."

 

 

 

"그럼 훈족의 기원에 대한 결론은 '정확히 알 수 없음' 이겠구나."

 

짐을 꾸려라! 훈족이 온다!

 

 

 

4세기 중반 오늘날 러시아 남부 북 캅카스의 쿠반강과 테렉강 사이에 해당하는 알란족이 세운 국가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월지족과 원수지간이었던 오손족이 세운 나라로 알려져 있다.

 

 

 

"원래 오손인은 흉노족과 연합해 월지를 쫓아내었으나, 곧 흉노족에게 통수를 맞았으니까.."

 

 

 

"그럼 그 오손인의 일부가 서쪽으로 도망쳐 쿠반강과 테렉강 사이에 정착했다는 거야?

 

 

 

"맞아 그들이 바로 알란족의 조상이지."

 

 

 

360년경 볼가강 하류를 건넌 훈족은 얼마 뒤 발람베르의 지휘 아래 다시 돈 강을 건넜다.

 

이것이 유럽 역사상 첫 훈족의 등장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훈족의 역사가 초기 유럽의 활약상이 전혀 없었던 중국 역사가에 의해 기록되었단 점이야."

 

 

 

"중국인들은 예부터 남일에 간섭하기 좋아했던건가?"

 

 

 

고향을 떠난 알란족의 일부는 게르만이 사는 유럽으로 들어갔다. 이들은 훗날 게르만족 대이동 물결에 휩싸이게 된다.

 

그리고 결국 이베리아 반도 동부에 도달했고. 이곳에 살던 서고트족에 융화되어, 훗날 카탈루냐인을 형성했다.

 

한편 지배를 받는 쪽을 택한 알란족은 오늘날 오세트 인의 조상이 되었다.

 

 

 

"이는 오늘날 러시아의 자치 공화국인 세베로 오세티야 공화국 영토에 해당해."

 

 

 

훈족이 알란족을 정복하자 알란족의 이웃인 동고트 족에게 불똥이 튀었다. 당시 동고트 족은 오늘날 우크라이나 전 지역에 해당하는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훈족의 공격으로 흑해에 대한 지대권을 상실했다.

 

375년에 훈족이 드네프르 강 유역에 침입했다.

 

 

 

"동고트의 왕 에르마나리크가 고령의 나이로 맞서 싸웠으나... 전쟁에서 패한 후 자살을 택하게 되지."

 

 

"뿐만 아니라 그해 여름 우크라이나에서 활약하던 동고트 왕국과 속주 초원 부족 연맹이 환전히 무너졌고..."

 

 

 

"그럼 다음 목표는 서고트족이었겠네?"

 

 

 

"당연하지. 하지만 자신들보다 훨씬 강한 동고트가 속수무책으로 무너진 것을 본 서고트는."

 

 

 

"남하하여 도나우 강을 건너 로마로 들어갔지. 이는 곧 게르만족 이동으로 이어졌고."

 

 

 

훈족은 우랄산맥에서 카르파티야 산에 이르는 광대한 유럽 평원을 완전히 장악했다.

 

그리고 405년경 훈족은 카르파티아 산을 넘어 서쪽으로 이동, 판노니아 평원(헝가리)을 점령하고 도나우 강 유역 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그러나 432년 루길라가 부족을 통일하고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려다가, 세상을 떠나자

 

갓 서른을 넘긴 젊은이가 그의 형과 함께 왕위에 오르는데........

 

 

 

그가 바로 신이 내린 재앙, 신의 채찍, 아틸라이다.

 

 

 

신의 채찍, 아틸라

 

 

 

 

아틸라의 이미지 묘사중 가장 사실적이라고 손꼽히는 것은 로마 역사가 프리스쿠스의 기록이다.

 

동일한 인물 묘사라도 개인의 주관적인 견해와 이해 정도에 따라 그 내용은 천차 만별일 수밖에 없다.

 

 

 

"전편에서 말했듯이 대다수 유목민은 말을 탄 위풍당당한 용사로 그렸고,"

 

 

 

"르네상스시대 이탈리아 인은 낭만적인 음유시인으로 묘사했지."

 

 

 

"그러면 헝가리 인들은 어떻게 묘사했는데?"

 

 

 

"아틸라의 후예임을 자처했던 그들은 겸손하고 후덕한 이미지의 위대한 국왕으로 묘사했지."

 

 

 

400년경에 태어난 아틸라는 434년에 자신의 형 블레다와 함께 부족경쟁자를 모두 제거한 뒤 훈족의 공동 지배자가 되었다.

 

왕위쟁탈전에서 살아남은 아틸라의 반대파가 동로마제국으로 도망치자 아틸라 형제는 이를 비호한다는 구실로 도나우 강을 건너 동로마 제국을 공격했다.

 

 

 

"그렇게나 갑작스레!"

 

 

 

"동로마 제국 입장에선 정말 충격과 공포였지.."

 

 

 

"이에 동로마 제국 황제는 서둘러 평화협상단을 보내."

 

 

 

"이때 아틸라가 말 위에서 협상을 했는데 이후로 기마 협상은 유목민의 관습으로 남게되지."

 

 

 

협상 결과 양측은 마르구스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에 따라 동로마 제국은 일방적으로 훈족의 요구를 들어줄 수 밖에 없었다.

 

 

 

"아틸라의 반대파를 송환하는건 물론.."

 

 

 

"막대한 양의 공물과 배상금을 바쳐야 했다고."

 

 

 

"유목민을 야만인이라고 깔보던 로마 입장에서는 정말 충격이었겠네.."

 

 

 

"하지만 협상이 헛된 것만은 아니었어."

 

 

 

훈족 군대가 철수한 뒤 일단 숨통이 트이게 된 동로마 제국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강화하고 해로를 따라 성벽을 새로 쌓았다.

 

또 도나우 강 유역 방어체계를 강화하고 철저한 방어시스템을 구축했다.

 

 

 

"비록 마르구스 조약은 굴욕적인 불평등 조약이었겠지만..."

 

 

 

"동로마가 협상으로 얻은 3년이란 시간은 1000년간 동로마를 지켜주는 원동력이 되었단거지.."

 

 

 

테오도시우스 성벽의 3단구조. 콘스탄티노플 외곽의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서양 역사에서 최고로 화자되는 도시 방어 구조물이다.

 

이 성벽덕분에 비잔틴 문명은 훈족, 아랍인, 아바르족, 슬라브족, 불가르족, 바이킹족 등 숨낳은 외세의 침입을 막아내며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괜히 테오도시우스 대제라 부르는게 아니구나!"

 

 

 

동로마 제국에서 철수한 아틸라 형제는 약 3년간 사산조 페르시아 정복에 주력했다.

 

 

 

"그러나 아르메니아에서 반격한 사산조의 공격에 크게 패한 후.."

 

 

 

"페르시아 정복을 포기하고 다시 서쪽으로 눈길을 돌렸지.."

 

 

 

"도나우강 유역 방어를 책임지던 동로마 제국 군대는.."

 

 

 

"카르타고에 침입한 반달족과 아르메니아에 침입한 페르시아와 싸우느라 지칠대로 지친 상태였다는 거지?"

 

 

 

그 덕분에 훈족은 쉽게 도나우 강 방어선을 뚫고 곧바로 발칸 반도에 진입해서 일리리아(아드리아 해 동북연안)와 오늘날 세르비아에 해당하는 지역을 공격했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 또다시 막대한 배상금을 치룬 뒤에야 훈족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도 가만히 있지는 않지.."

 

 

 

"곧바로 북아프리카에 주둔 중인 제국군을 발칸으로 회군시켜 훈족과의 결전을 준비했다고.."

 

 

 

443년에 다시 동로마 제국으로 창끝을 돌린 아틸라 형제는 곧바로 제국 심장부까지 위협했다.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 기병 부대는 모에시아(오늘날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와 트리키아(오늘날 불가리아, 그리스, 터키에 걸쳤다)를 휩쓴 뒤 계속해서 

 

세르디카, 필리포 폴리스, 아드리아노플을 점령했다.

 

 

 

콘스탄티노플을 제외한 모든 동로마 제국의 군사 요새와 군대가 훈족에게 짓밟혔다.

 

 

 

"그러나 훈족은 성을 공략하는 기술이 부족했기에..."

 

 

 

"완벽한 방어벽을 갖춘 콘스탄티노플은 넘지 못했지.."

 

 

 

콘스탄티노플이 약탈당하는 굴욕은 모면했으나 테오도시우스 2세는 결국 패배를 인정하고 다시 굴욕적인 아드리아 노플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에 의거해 동로마는 배상음 6000파운드를 지급하고.."

 

 

 

"매년 세배에 달하는 공물 2100파운드를 바쳤다고.."

 

 

 

"그래도 테오도시우스 성벽으로 멸망은 피한거네.."

 

 

 

445년에 아틸라의 형 블레다가 급사했다.

 

 

 

"아틸라가 암살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지."

 

 

 

"애초에 블레다는 국정에 관심이 없었다는 기록도 있으니.."

 

 

 

"그럼 아틸라가 블레다가 지배하던 영지와 부족을 모조리 합병해서.."

 

 

 

"공동왕이 아닌 유일한 왕이 되었다는 거지.."

 

 

 

"진정한 왕이된 아틸라의 첫 목표는 바로 동로마 정복이었고.."

 

 

 

아틸라의 이상이 현실이 된 것인가? 445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445년과 446년에는 극심한 기아와 전염병이 제국전체를 뒤덮었다.

 

447년에는 대지진이 일어나 콘스탄티노플 성벽의 주요부분이 무너지기에 이른다.

 

 

 

"이런 기회를 놓칠 아틸라가 아니지.."

 

 

 

"그는 곧바로 도나우 강을 건너 모에시아로 향했지.."

 

 

 

"별다른 피해도 없이??"

 

 

 

도중에 고트족 출신 로마 군대를 만난 것 이외에는 별다른 저항없이 발칸 반도를 지나갓다.

 

아틸라 군대는 그리스 동부 테르모 펠레(페르시아 전쟁중 가장 유명한 테르모펠레 전투의 격전지 맞다.)에 이르러 발길을 멈추었다.

 

 

 

대체 왜? 무슨 까닭일까?

 

 

 

"콘스탄티노플 모든 시민과 군대가 힘을 합쳐 성벽 보수를 끝내고.."

 

 

 

"일부에 성벽을 새로 쌓아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기 때문이지.."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다시한 번 콘스탄티노플.. 아니 동로마를 구해낸 거구나!!"

 



"그러나 동로마의 피해도 막심한 것이어서.."

 

 

 

"100여개의 도시가 파괴되었고 인명피해는 그 수를 셀 수가 없었다고.."

 

 

 

심지어 교회나 수도원에 침입하여 많은 수도사와 수녀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수많은 살육과 강간, 약탈 끝에 동로마는 프리스쿠스를 대표로 하는 협상단을 파견하였다.

 

 

 

협상안은 도나우 강 남쪽 영토였다. 결국 훈족은 영토를 넘겨받는 조건으로 군대를 철수 하였다.

 

 

 

"그러나 테오도시우스 2세가 죽고 아틸라의 관심이 다른곳으로 이동하면서 .."

 

 

 

"사실상 없는 조약이나 마찬가지가 되어버렸지.."

 

 

 

"관심이 어디로 이동했는데?"

 

 

 

"동로마를 재패한 아틸라가 다음 목표로 삼은 것은...."

 

 

 

"바로 서로마 제국이었고 아틸라는 자신의 군대에게 서로마의 침공을 울부짖었지."

 

 

결전은 서로마로

 

 

 

 

 

도나우 강 남부 영토가 훈족에게 할양되지 않자 화가 난 아틸라는 동로마 제국침략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뜻밖의 사건이 일어나 그의 시선이 서로마 제국으로 향하게 된다.

 

 

 

 

 

과연 어떤 사건이 아틸라의 눈길을 끈 것일까? 동로마 침략의 고삐를 늦춘 것일까?

 

 

 

 

 

서로마 제국의 황제 발렌티아누스 3세의 여동생 호노리아 공주가 원치 않은 결혼을 피하기 위해 아틸라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호노리아 공주는 공교롭게도 성의를 보이기 위해 자신이 끼고 있던 반지를 아틸라에게로 보냈다.

 

 

 

 

 

"호노리아 공주는 문란한 여자였는데.."

 

 

 

 

 

"여차저차해서 시종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고 아이는 곧 낙태되지."

 

 

 

 

 

"그리고 정략혼을 하게 되었다는 거지?

 

 

 

 

 

"그래. 맞아 독신생활이 싫증난다는 이유로 몰래 구혼을 했지."

 

 

 

 

 

그런데 이 미친년은 제 정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결혼 지참금으로 갈리아 지방을 포함한 서로마 제국의 영토 절반을 발렌티아누스 3세에게 요구했다.

 

 

 

 

 

"아니 시발 이게 말이되냐?"

 

 

 

 

 

"결혼하는 것도 안될판에 갈리아 지방을 할양하라니!!"

 

 

 

 

 

"당장 호노리아를 추방하고 아틸라에게 결혼 무효를 통보해라!!"

 

 

 

 

 

화가 난 아틸라는 동로마를 공격하려했던 계획을 취소하고 정복지의 게르만족 용병과 알란족 군대를 앞세워 서로마 제국으로 향했다.

 

이 사건으로 동로마는 아틸라의 시선을 다른곳으로 돌림으로서 한 시름 놓을수 있었다.

 

 

 

 

 

"451년 2월, 아틸라는 모든 병력을..."

 

 

 

 

 

"헝가리 초원에 집결시키고 먼저 갈리아를 공격했지."

 

 

 

 

 

훈족 군대는 라인강 유역 부르군트 왕국을 점령하고, 갈리아 북부, 트리어, 메츠, 낭시, 량스, 아미앵을 휩쓸었다.

 

서로마 제국의 요새가 잇따라 함락되고, 점령당한 도시는 대부분 잿더미로 변했다.

 

 

 

 

 

아틸라가 라인강을 건너려 할때 어디선가 나타난 1만여명의 수녀들이 갑자기 길을 막았다. 

 

이들은 브리튼 섬을 떠나 로마 교황청으로 가려던 길이었다. 아틸라는 수녀들이 명령에 따르지 않자 홧김에 1만여명이 넘는 수녀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위 그림 중앙에 살해된 여자가 훗날 로마 교황청이 성녀로 숭배한 우르술라이다.

 

 

 

 

 

"소식을 들은 로마 교황청은 적지 않은 충격에 휩싸였지."

 

 

 

 

 

"뿐만 아니라 갈리아 북부의 로마군이 모두 패주했으니..."

 

 

 

 

 

드디어 파리가 아틸라의 눈앞에 나타났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한 파리를 지켜 줄 그 무언가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기적이 일어났다.

 

 

 

 

 

"아틸라가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갑자기 군대를 철수한거야!"

 

 

 

 

 

무엇이 그의 군대를 철수 시켰을까?

 

 

 

 

 

파리 주교 게르마누스가 보살피던 일곱살 난 고아 주느비에브가 파리를 구했노라고 로마 교황청은 발표했다.

 

주느비에브가 십자가를 들고 아틸라를 찾아가 용감하게 아틸라가 들고있던 칼을 빼앗아 그의 칼집에 꽂으며 그를 감동시켰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거짓이나 과장일지라도.."

 

 

 

 

 

"분명 파리에게는 엄청난 기적이었겠구나.."

 

 

 

 

 

"맞아. 파리는 아틸라 이전까지 그냥 갈리아의 평범한 도시였지만.."

 

 

 

 

 

"훈족에게 약탈을 면했다는 이유만으로 갈리아의 정치 및 경제 중심도시가 되었지."

 

 

 

 

 

파리를 떠난 아틸라는 남하하여 갈리아 중부 최대 도시인 오를레앙을포위했다. 

 

서로마 제국의 입장에서는 오를레앙이 함락되면 갈리아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므로 매우 심각한 위기 상황이었다.

 

 

 

 

 

이에 7월 14일 아에티우스 서로마 총사령관이 이끄는 로마 군대는 서고트-게르만 연합군과 함께 오를레앙을 포위한 훈족을 공격했다.

 

수세에 몰린 아틸라는 일단 트루아로 후퇴햇다.

 

 

 

 

 

"7월 20일 트루아 북부 샬롱에서 다시만난 양군은 치열한 전투를 벌였지."

 

 

 

 

 

"양측의 국운이 걸린 싸움.."

 

 

 

 

 

이렇게 배치를 마친 뒤 양측 군은 서로를 향해 접근하기 시작한다. 

 

두 군이 어느정도 가까워지자 아틸라는 급작스럽게 자신의 중앙군을 이끌고 돌격하기 시작하였다. 때문에 양쪽 날개가 서로 맞붙기 전에 이미 아틸라 군과 상기반 군 병력간 교전이 시작된다. 

 

중앙이 치열하기 교전하는 동안 전진하고 있던 우익의 서고트족과 훈족의 좌익을 맡은 동고트족이 전투에 돌입하였고 서고트족을 직접 지휘하던 테오도릭 1세가 전사할정도로 치열한 접전이 이어졌다.

 

 

 

 

 

"테오도릭의 전사 이후 서고트족은 잠시 혼란에 빠졌으나 언덕 위에서 이를 지켜본 테오도릭 1세의 아들 토리스먼드는"

 

 

 

 

"기병을 이끌고 언덕에서 내려와 동고트족의 좌측을 향해 돌진했어."

 

 

 

 

이 덕분에 서고트족은 전열을 재정비하고 다시 전투에 돌입할 수 있었다.

한편 좌익에 포진된 아에티우스의 로마군은 공격하지 않고 그 자리를 사수하고 있었는데 우익의 게피드 족 역시 로마군에게 덤비지 못한 채 공격할 기회를 엿보며 서로 마주보게 된다. 

 

이렇게 대치하는 동안 중앙의 훈족은 알라니족을 뒤로 계속 밀어붙였고 시간이 지나자 훈족은 로마군에게 후미를 노출시키게 된다.

 

 

 

 

 

"이날의 전투를 오늘날 카탈라우눔 전투 혹은 샬롱 전투라고 불러."

 

 

 

 

 

"아틸라를 상대로한 유럽인의 유일한 승리이지.."

 

 

 

 

 

"로마-게르만 세계가 아틸라에게 짓밟히는걸 막은 전투라는 거구나."

 

 

 

 

 

"그래. 그래서 에드워드 기번은 이 전투를 '아틸라를 라인강 유역에서 쫓아낸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승리'라고 표현했어."

 

 

 

 

 

여기서 놀라운 점은 아틸라가 정말 발군의 회복력을 보였다는 것이다. 

 

일단 본거지로 돌아가 군대를 재정비한 아틸라는 다시 군대를 일으켜 호노리아와의 혼사를 거론하며 이탈리아 북부를 공격했다.

 

아틸라 군대는 밀라노와 파비아를 점령했다.

 

 

 

 

 

밀라노와 파비아를 점령한 아틸라는 로마제국의 유서깊은 도시 아퀼레이아를 공격하여 완전히 잿더미로 만들었다,

 

위기를 느낀 황제 발렌티아누스 3세가 수도 라벤나를 버리고 도망쳤다.

 

 

 

 

 

"아에티우스가 모함으로 죽은 후였기 때문에.."

 

 

 

 

 

"더 이상 그 무엇도 아틸라를 막지 못했었던거야."

 

 

 

 

 

이에 로마 교황 레오 1세는 로마 집정관 둘과 홀연히 아틸라를 만났다.

 

그러자 아틸라는 호노리아와의 혼사문제를 제기하고나 서로마 제국 영토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무엇이 아틸라를 철수하게 하였는가?

 

 

 

 

 

 

"의혹에 싸인 이 날의 철수는 여러 추측을 낳았지."

 

 

 

 

 

"역사가 프리스쿠스는 로마를 약탈한 직후 숨을 거둔 서고트왕 알라리크의 징크스를 두려워 해 그랬다고 하기도 하고.."

 

 

 

 

 

"로마 교회는 레오 1세의 설득과 성 패트루스와 파울로스의 보살핌때문이라고 주장했지."

 

 

 

 

 

"하지만 실제로는 전염병이 훈족 군대에 퍼져서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야."

 

 

 

 

 

"이유가 어쨌건 서로마가 멸망하지는 않았구나..."

 

 

 

 

 

 

452년 겨울 마르키아누스 황제가 영토할양을 다시 거부하자 

 

아틸라는 분노하였다. 훈족의 공포가 언제 동로마에 들이닥칠지 몰랐다. 

 

훈족에 대한 두려움으로 제국 전체가 꽁꽁 얼어부었다.

 

 

 

 

"하지만 아틸라의 꿈은 실현되지 않았지."

 

 

 

 

 

"왜??"

 

 

 

 

 

"그가 죽었거든."

 

 

 

 

 

아틸라는 453년 봄 시작할 전쟁을 앞두고 짧은 여유를 만끽하며 일디코라는 부르군트 여인을 새 아내로 맞아들였다.

 

여기서 아틸라는 뜻밖의 죽음을 맞이한다. 프리스쿠스의 기록에 다르면 일디코와 첫날밤을 맞이하다 사망했다고 한다.

 

당시로서 고령이었던 50세를 넘긴데다 폭음을 했으니 돌연사해도 이상할건 없었다.

 

 

 

 

 

"하지만 후대 프랑스인들은 이 여인이 부르군트 출신임을 들어 아틸라의 죽음을 자신들의 공으로 만들고자 했어."

 

 

 

 

 

"그래서 일디코가 아틸라를 첫날밤에 살해햇다고 이야기를 만들었고 그렇게 확신했지."

 

 

 

 

 

"이 이야기가 오랫동안 널리 퍼진 이유는 성경에 나온 블레세인이 유대 영웅 삼손을 죽인 일과 비슷하면서 매우 드라마틱해서.."

 

 

 

 

 

"유럽인의 구미에 딱 맞았다는 거지?"

 

 

 

 

 

"맞아. 일종의 정신승리랄까?"

 

 

문화유산으로 남아버린 '야만행위'

 

 

 

 

 

아틸라의 급사후 훈족은 마치 영혼을 잃은 사람처럼 위청거렷다. 밀물처럼 밀려왔던 훈족은 썰물처럼 유럽대륙밖으로 빠져나갔다.

 

다양한 민족, 수많은 부족으로 이루어진 훈족의 모래성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동고트족, 게피다이족 등 훈족에게 지배받던 게르만 부족 대부분이 훈족에게 등을 돌렸다.

 

 

 

 

 

 

454년에 게르만 연합군이 판노니아에서 훈족을 대파했다. 

 

이떄 아틸라의 후계자인 큰아들 엘락이 전사하면서 훈족의 재기는 더욱 불투명해졌다.

 

 

 

 

 

"또 다른 아들 덴기지크가 이끄는 훈족이 흑해 북부연안으로 후퇴해 제기를 노렸으나.."

 

 

 

 

 

"469년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다 덴기지크가 사망하고 훈족이 대파당했지."

 

 

 

 

 

"덴기지크의 목은 콘스탄티노플 시내에 걸렸다고 하더군."

 

 

 

 

 

아틸라의 또 다른 아들 에르낙을 중심으로 명맥을 근근히 유지하던 훈족은 아바르 족의 공세에 밀려 다시 서쪽으로 이동했고

 

훈족의 남은 잔당은 불가르족이 사는 아조프 해 연안에 숨어들면서 불가르 족에 흡수되었다.

 

이를 종합할때 훈족의 최후 유전자는 불가리아 인에게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오랫동안 훈족의 후예로 알려진 마자르 족은,

 

역사적으로 훈족과 접촉할 가능성이 제로에 가까웠다.

 

 

 

 

 

"훈족은 오로지 약탈과 파괴만을 일삼은 민족이야. 인류발전에 이바지 한 거라곤 강대한 군사력뿐이지."

 

 

 

 

 

"훈족의 서천으로 시작딘 대이동으로 인류사에 손꼽히는 고대 문명들이 파괴되었고 이 활약상은 수많은 야만행위의 본보기가 되었지."

 

 

 

 

 

"아틸라가 동로마를 공격할 때 한말이 있어."

 

 

 

 

 

"로마인이 '훈족'의 이름을 1000년동안 잊지 못하게, 다시는 훈족을 무시못하게 만들어야한다!!!!!!"

 

 

 

 

 

이로부터 1400년 뒤인 1900년대 중국 의화단 운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아틸라가 한 말을 똑같이 그의 병사들에게 전했다.

 

"중국인이 '독일'의 이름을 1000년동안 잊지 못하게, 다시는 감히 독일을 무시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라고 말이다.

 

아틸라가 시작한 야만행위가 일종의 문화유산이 되어버린셈이다.

 

게르만족 대이동을 불러왔고 유럽각지의 문명을 파괴했으며 동서로마제국의 기반을 뒤흔들어 게르만 왕국 건립에 결정적 도움을 주었고,

 

동유럽 출신 민족이 장장 600여년간 강력한 무력으로 유럽가톨릭문명을 제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한 훈족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신의 채찍, 훈족의 대이동

유럽인의 영원한 악몽서양 사람들이 역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아시아 역사 인물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을뽑는다면, 과연 누가 가장 많은 표를 얻을까?"석가모니? 진시황? 공자? 칭기즈칸? 누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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