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정벌 당시 척준경 전투기록

1104년

 -임간이 또 공로를 바라고서, 훈련되지 않은 군사를 이끌고 갑자기 나가 싸웠으니, 패해서 죽은 자가 절반이나 되었다. 오직 추밀원 별가(樞密院別駕) 척준경(拓俊京)만이 병기(兵器)와 개마(介馬, 갑옷을 입힌 말)를 임간에게 청하여 적진으로 들어가 그 장수 하나를 죽이고 포로된 자 2인을 빼앗았다. 마침내 교위(校尉) 준민(俊旻)·덕린(德麟)과 함께 각기 적 1인씩을 쏘아 죽이자 적이 조금 물러났었는데, 군사를 되돌리자 적들은 백기(百騎)로 추격해 왔다. 척준경과 대상(大相) 인점(仁占)이 적장 2인을 쏘아 죽이자, 적은 감히 앞으로 나오지 못하고 아군은 성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이에 여진은 이긴 틈을 타서 정주(定州)의 선덕관성(宣德關城)에 쳐들어와 살생과 약탈을 무수히 하였다. 그 공로로써 척준경에게 천우위 녹사참군(千牛衛錄事參軍)을 제수하고, 유사가 임간 및 병마사 좌복야 황유현(黃兪顯), 부사(副使) 대장군 송충(宋忠), 호부 시랑 왕공윤(王公胤), 우승선 조규(趙珪)의 패배한 죄를 탄핵 상주하여 모두 파직시켰다.

 

1107년

-이에 고라(古羅) 등 4백여 인이 이르는지라, 술을 먹여 취하게 하고 복병을 내어 섬멸하였다. 그중에 건장하고 약은 자 5, 60인은 의심을 품고 관문에 이르러 들어오려 하지 않았는데, 병마 판관 김부필(金富弼)과 녹사(錄事) 척준경(拓俊京)이 길을 나누어 복병하고, 또 최홍정을 시켜 정예한 기병으로 호응하게 하여, (그들은) 거의 다 사로잡거나 죽였다.

 

-병신일에 좌군(左軍)이 석성(石城) 아래에 이르러 여진이 모여 둔을 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역자(譯者) 대언(戴彦)을 보내 항복하기를 권유하니, 여진이 말하기를,
“우리가 한 번 싸워 승부를 결정하고자 하는데, 어찌 항복하라고 말하는가?”

하고는, 드디어 석성으로 들어가 항전하니, 시석(矢石)이 빗발치듯 하여 우리 군사가 앞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윤관이 척준경에게 말하기를,
“해가 기울어 가고 있어 일이 급하게 되었다. 네가 장군 이관진(李冠珍)과 함께 공격하라.”
하니, 대답하기를,
“제가 일찍이 장주(長州)에 종사관(從事官)으로 있을 때 잘못하여 죄를 지었는데, 공께서는 제가 장사(壯士)라고 여겨 조정에 청하여 용서해주셨으니, 오늘은 이 척준경이 목숨을 바쳐 은혜를 갚을 기회입니다.”

하고, 마침내 석성 아래에 이르러 갑옷을 입고 방패를 들고서, 적진 가운데로 들어가 추장 몇 명을 격살하니, 이에 윤관의 휘하 군사와 좌군(左軍)이 합쳐 죽음을 무릅쓰고 공격하여 크게 패주시켰다. 척준경에게 비단 30필을 상주었다.

 

 

1108년

 

-을축일에 윤관·오연총이 정병(精兵) 8천 명을 이끌고 가한촌(加漢村) 병항(甁項, 속칭 병목)의 소로로 나아갔다. 적들은 숲 속에 복병을 설치하고 망을 보고 있다가, 윤관의 군사가 이르자, 이들을 갑자기 공격하여 군졸이 모두 흩어지고 오직 10여 인만 남았다. 적군이 윤관 등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는데, 오연총은 유시(流矢)에 맞아 형세가 위급하게 되었다. 척준경이 용사 10여 인을 거느리고 구하려고 하는데, 그 동생 낭장(郞將) 척준신(拓俊臣)이 말리며 말하기를,
“적진이 견고하여 깨뜨릴 수 없으니, 한갓 죽기만 할 뿐 무익합니다.”
하니, 척준경이 말하기를,
“너는 돌아가 노부(老父)를 봉양하거라. 나는 몸을 나라에 바쳤으니, 의리상 그대로 있을 수가 없다.”

하고는, 곧 크게 외치며 돌진하여 10여 인을 격살하였다. 최홍정·이관진 등이 산골짜기에서 군사를 이끌고 내려와 구원하니, 적이 그제야 포위를 풀고 도망하므로 뒤쫓아 36급을 베었는데, 윤관 등이 날이 저물어서야 영주성(英州城)으로 다시 돌아와 눈물을 흘리며 척준경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지금부터 나는 너를 아들처럼 볼 것이니, 너도 마땅히 나를 아비처럼 보아야 한다.”
하고는, 제지(制旨)를 받들어 합문 지후(閤門祗候)를 제수하였다.

 

-정축일에 적의 보기(步騎) 2만여 명이 와서 영주성(英州城) 남쪽에 둔치고 크게 외치며 도전해 왔다. 윤관이 임언(林彦)에게 말하기를,
“저들은 많고 우리는 적어서 대적할 수 없는 형세이니, 다만 굳게 지킬 뿐이다.”

하니, 척준경이 말하기를,
“만약 나가서 싸우지 않는다면 적병이 날로 증가할 것입니다. 성안의 양식은 곧 다 되어가고 외부의 구원은 오지 않는데, 장차 어떻게 하겠습니까? 전일의 승첩을 제공께서는 보지 못하셨습니까? 오늘 역시 사력을 다해서 싸우겠으니, 청컨대 제공께서는 성에 올라가 구경하십시오.”

하고는, 곧 죽기를 맹세한 군사를 이끌고 성을 나가 싸워 19급을 참하니, 적이 패배하여 달아났다. 척준경이 피리를 불면서 개선하여 돌아오니, 윤관 등이 누(樓)에서 내려가 맞이하여 손을 잡고 절을 나누었다.

 

-권지 승선(權知承宣) 왕자지(王字之)가 공험성(公嶮城)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도독부로 오는데, 갑자기 오랑캐 추장 사현(史現)의 군사를 만나 싸우다가, 불리하여 타고 있던 말을 잃어버렸는데, 척준경이 즉시 날쌘 군사를 이끌고 가서 구원해, (그들을) 격퇴하고 오랑캐의 개마(介馬)를 빼앗아 돌아왔다.

 

-임진일에 여진병 수만 명이 와서 웅주성(雄州城)을 포위하므로, 최홍정(崔弘正)이 사졸을 훈려(訓勵)하니, 군중이 모두 싸울 것을 생각하여 즉시 네 문을 열고 일제히 나가 분격(奮擊)해서 크게 패주시켰으며, 80여 급을 사로잡아 베고 병거 50여 량(輛)과 중거(中車) 2백 량과 말 40필을 얻었으며, 그 나머지 (노획한) 병장기(兵仗器)는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때에 척준경이 성중에 있었는데, 주수(州守)가 말하기를,
“성(城)을 지킨 지 날이 오래 되어 군량이 장차 다하게 되었고, 외부로부터 구원은 이르지 않는데, 공이 만약 성을 나가 군사를 거두어 돌아와서 구원하지 않는다면, 성안의 사졸(士卒)은 아마도 살아 남는 자가 없을 것이다.” 

하였다. 척준경이 사졸의 해진 옷을 입고 밤에 성에 줄을 매달아 내려가서, 정주(定州)로 돌아가 군사를 정돈하여, 통태진(通泰鎭)을 거쳐 야등포(也等浦)로부터 길주(吉州)에 이르러 적병을 만나서 싸워 크게 패퇴시키니, 성안의 사람들이 감격하여 울었다.

 

-행영 병마판관 왕자지(王字之)와 척준경(拓俊京)이 여진과 더불어 함주(咸州)·영주(英州) 두 주에서 싸워 33급을 참하였다.

 

-왕자지와 척준경이 또 여진을 사지령(沙至領)에서 공격하여, 27급을 참하고 3인을 사로잡았다.

 

-왕이, 척준경에게 여러 차례의 전공(戰功)이 있었다고 하여, 그의 아버지 검교 대장 척위공(拓謂恭)을 내전(內殿)에서 인견하여, 조용히 위로하고 주식 및 은(銀) 1정(錠)과 갱미(粳米) 10석(碩)을 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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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랑 고려사절요에 실린 척준경 전투기록은 이게 전부(본문은 고려사). 이것만 해도 이미 한국사 최강급 사기캔데 왜 굳이 포도팔이 하면서 띄우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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