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위대한 문화유산, 백제금동대향로 -2부-

<중국의 경우에도 이와 비슷한 향로는 많이 있으나 백제금동대향로의 아름다움에는 미치지 못한다>


뚜껑의 정상부에는 봉황이 턱밑에 여의주(如意珠)를 끼고 있고, 그 아래로 다섯 악사와 봉황, 뱀을 물고 있는 짐승 등 상상의 동물과 현실세계에 실재하는 호랑이, 코끼리, 원숭이, 멧돼지 등 모두 42마리의 짐승(먹이로 잡혀 먹히는 두 마리와 어미 뒤에 있는 새끼도 포함), 5인의 악사를 비롯한 17명의 인물이 74곳의 봉우리와 그 사이사이에 돋을새김[浮彫]되어 있습니다. 


이 밖에도 6종류의 식물, 20군데의 바위, 산 중턱을 가르며 난 산길, 산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입체적으로 돌출되어 낙하하는 폭포 등이 보입니다. 이러한 다양한 형태의 인물과 짐승들은 거의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진행되는 고대 스토리 전개의 구성원리를 따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네 다리의 동물들은 앞발을 들어 왼쪽으로 전진하는 생동감을 충실히 묘사하고 있고 말탄 사람[騎馬人物]의 경우는 말의 목과 사람의 시선은 오른쪽으로 돌리고 있으나 말은 왼쪽으로 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북쪽으로부터 들어오는 악귀를 막는 기능을 하는 포수(鋪首)가 봉황의 꼬리 쪽에 위치하고 있어 봉황은 남쪽을 바로 보게 배치되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렇게 볼 때 정면을 바라보는 봉황과 그 아래의 완함 연주 주악상과 낚시하는 사람이 있는 부분이 처음부터 정면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백제금동대향로의 뚜껑 부분에는 74개의 약화(略畵: 사물을 직접 취재하거나 기억을 더듬어서 간략하게 대강 그린 그림)된 봉우리가 새겨져 있습니다. 산과 산 사이, 계곡과 계곡 사이에 한가로이 오가는 선인들과 동물들의 모습이 재미있게 묘사되어 있죠. 봉우리의 모양새는 굴곡이 심하지 않은 단봉을 중첩시켰고, 각 봉우리의 테두리에는 빗금모양의 문양을 조각해 넣어 입체감을 살렸습니다.


이 향로의 중첩된 산을 정돈하여 보면 모두 5단이며 그 단은 각각 5봉우리로 이루어져 그 결과 큰 산은 25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큰 산의 각 단은 엇갈리게 배치되었고, 또 큰 산과 연결되는 작은 49 봉우리도 있어 그 결과 뚜껑의 산은 매우 중첩된 양상이 되었습니다. 이 산들은 모두 공제선(控除線: 하늘과 지형이 맞닿아 경계를 이루는 선)을 따라 테두리를 하고 그 내부를 직선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이 직선의 선각은 용의 날개와 목덜미 그리고 향로의 몸체(爐身)를 감싼 연꽃잎 가장자리의 직선 등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박산은 도교적인 사상의 모체가 되며, 아래의 연꽃문양에서 나타나는 연화화생(연꽃이 만물을 성서로운 조화로서 다시 탄생시킨다는 불교적 생성관)의 불교적 정신과 결합하여 동양적인 정신세계를 백제만의 독창적인 표현기법으로 나타낸 것으로 백제공예미술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물의 어머니를 상징하는 연꽃

백제금동대향로의 몸체는 용모양의 받침이 받치고 있는 연꽃봉오리의 형상입니다. 반원형의 대접 모양을 한 몸체는 3단의 연꽃잎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연꽃잎의 끝부분을 사선문[斜線文]으로 음각하여 생동감있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는 백제특유의 연꽃 표현방식으로 무령왕릉 출토 동탁은잔의 상부 연봉형 장식 아래 부분이나 부여 외리 무늬벽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층을 이룬 연꽃 잎은 몸체의 굴곡과 비례를 이루도록 윗단(上段)의 폭이 가장 넓고 아래로 가면서 점차 줄어드는데 제일 하단의 연꽃잎에는 2줄의 음각선을 복엽(複葉)으로 묘사하였습니다. 윗단과 그 아랫단 연꽃잎 사이의 여백에는 27마리의 짐승과 2명의 사람이 돋을새김[浮彫]되어 있습니다.


생명의 근원인 바다를 상징하는 용

받침은 한 다리를 생동감 있게 치켜들고 있는 용의 모양을 형상화하여 입으로 몸체인 연꽃봉오리를 받치고 있습니다. 용이 한쪽 발을 치켜들고 있으며 나머지 세 다리와 꼬리로 둥근 원을 형성하여 안정되게 만들었습니다. 받침에 표현된 용은 승천하는 듯한 격동적인 자세로 굴곡진 몸체와 그 곳에서 뻗어 나온 구름 모양의 갈기를 투각 장식하였습니다. 바다에 사는 용을 표현하기 위하여 용의 발톱 부분에 물결 무늬를 표현하였습니다. 물결 무늬와 다리 사이에 6엽의 연꽃 무늬를 나타내었는데, 용의 세 다리와 물결 무늬가 원형을 이루게 구성하여 안정감있는 구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용의 정수리에서 솟아오른 뿔은 두 갈래로 목 뒤까지 길게 뻗어 있고 길게 찢어진 입안으로 날카로운 이빨까지 세밀히 묘사되었습니다. 용의 입안에 물려진 짧은 기둥[幹柱]은 향로 몸체의 하부 받침과 연결시켰습니다. 용이 입에 물고 있는 기둥의 위로는 향로 받침과 몸체를 연결시키기 위한 기둥이 이어져 있고, 이 기둥은 몸체의 둥근 안쪽 면으로 약간 솟아 올라 그 끝에 별도의 고리를 끼워 고정시켰습니다.


부여 능산리 절터는 국립부여박물관에 의하여 조사되었으며 백제시대 절터로 사비도성의 외곽을 둘러싼 나성과 능산리고분군 사이에 형성된 협소한 계곡 내에 위치하고 있다. 절터는 중문, 목탑, 금당, 강당이 남북일직선상에 배치된 일탑일금당식의 가람 배치를 하고 있다. 목탑은 금당과 함께 이중 기단 위에 세워졌으며, 목탑터에서는 사리감이 발견되었다. 이 사리감에는 모두 20자의 글씨가 각자(刻字)되어 있는데, 건물터의 성격을 규명하는데 결정적인 자료가 되었다.


금당은 이중기단을 갖춘 팔작지붕으로 추정되며, 전면 5칸, 측면 3칸이다. 계단은 남북의 두 곳에만 설치하였다. 강당은 길이가 37cm나 되는 거대한 집으로 내부는 2개의 큰 방으로 나누어지며, 서쪽 방에는 온돌 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그 형태가 만주 집안에 있는 고구려시대의 동대자 유적과 비슷하다. 이 절터에는 공방 시설이 두 군데에서 발견되었는데 제 3, 4건물터이다. 이곳은 금속류, 칠기제품, 유리제품 등을 만들던 곳이다. 특히 제3건물터의 중앙 방의 장방형 목곽수조 안에서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견되었다. 사리감의 명문 내용으로 보아 이 절은 백제 왕실에서 발원한 기원사찰 또는 능사로서 A.D. 567년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백제 멸망과 함께 폐허화된 것으로 추측된다.


백제금동대향로의 출토

<부여 능산리 절터는 백제시대 절터로 사비도성의 외곽을 둘러싼 나성과 능산리 고분군 사이에 형성된 협소한 계곡 내에 위치해 있다>


<이곳 제 3 건물터의 중앙방의 장방형 목곽수조 안에서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견되었다>


살얼음이 얼을 정도로 추웠던 1993년 12월 12일 오후 4시 30분, 해가 뉘엇뉘엇 지고 부여 능산리의 고분 발굴도 어느 정도 마무리될 때 쯤이었습니다. 발굴을 담당하던 당시 부여박물관학예사는 공방의 수조라고 추측되던 물구덩이에 자꾸 신경이 쓰였습니다.


향로의 쓰임새

백제금동대향로는 용 모양 받침과 연꽃모양의 아랫 그릇이 서로 분리되므로 향재를 버리고 새로 담기에 편리하게 되어 있어서 기능적인 면에서도 완벽한 향로입니다.


백제금동대향로는 신선사상 및 불교사상뿐만 아니라 우리 겨레의 전통문화와 외래문화를 잘 융합시킨 걸작입니다.


백제금동대향로가 향을 피우기 위한 도구임에는 분명하나 그 정확한 용도를 알 수는 없습니다. 만약 이 향로가 사찰에서 불교의식을 거행할 때 사용된 제사용구라면 불교신앙적 배경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고대사에 나타난 도교와 불교의 습합(習合: 철학이나 종교 따위에서, 서로 다른 학설이나 교리를 절충함.)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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